임의진: 노르웨이의 길

앨범번호 : AMC2157
바코드 : 8809090673451
발매일 : 2015-03-06
장르 : 클래식

시인 임의진
[노르웨이의 길]


요즘 각광받고 있는 북유럽의 또 다른 시각, 아니 청각을 열어줄 만한 선곡음반이 발매되었다.  
북유럽 노르웨이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들만을 골라 모은 월드뮤직 선곡음반... 
시인의 감성으로 빚어낸 여행 이야기와 그 하룻밤의 오로라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노르웨이의 신비로운 침묵과 얼음길 위로 여울져 흐르는 희귀한 노래들... 
성가 가수 카롤라 마리아, 케롤라인 크루거, 손드레 브라트란드, 카리 브렘네스, 
오슬로 가스펠 합창단, 스크룩 합창단, 노르웨이 국립소년소녀합창단, 시그바르트 닥스란드, 
노벨상 수상식장의 노래손님 시너드 오커너까지 <여행자의 노래> 임의진 시인이 고르고 고른 18곡의 북유럽 백야의 노래들. 
발걸음 소리 들리는 소란스런 새봄과 기나긴 겨울밤을 위한 외로움과 고독의 노래. 
보헤미안, 쿠바, 러시아, 기차여행, 자전거여행, 담양여행 음반에 이은
또 다른 월드 뮤직 여행 시리즈...


[ 시인의 말 ]

무엇을 할 것인가, 유랑이 없다면...

‘정오의 희망곡’에선 틀어주지 않는 노래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 ‘만남의 광장’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뒤부터, 내가 모르는 세상이 너무 궁금해졌다. 가위로 아무리 잘라도 올라오는 풀처럼 나는 끝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막막하고도 먹먹한 길을 떠돌아다니는 청춘이었다. 그 길에서 만난 음악들을 당신에게 이처럼 차근차근 들려드리고 있는 중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유랑이 없다면...”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 
딱히 주저앉아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세상엔 있다. 처음부터 무엇을 쥐어본 일이 없는 손바닥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번 유랑자가 된다. 목이 마르면 마을의 흔한 샘보다 오래 빨아들인 수액으로 출렁거리는 고로쇠나무에다 입술을 대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 빽빽한 아파트의 수도꼭지로는 생명수를 마실 수 없다. 

하루는 북국 침엽의 숲을 찾아 길을 나섰다. 릴레함메르에서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에 섞여 길쭉한 스키 대신 쬐고만 만년필 한 자루 들고서 론단 국립공원을 넘어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지. 그 땅에서 나는 신비로운 침묵을 지닌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가을이 지났고, 낮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첫눈은 아직 햇볕 때문에 녹아버려서 바닥이 드러났지만 밤에는 추워서 물이 꽁꽁 얼었다. 그리고 풀과 곤충들은 모두 죽었다. 신비로운 침묵이 사람들 위에 내려 앉았다. 그들은 생각에 잠겼고 말이 없었다. ” (소설가 크눌프 함순/ 목신 판)

메아리들은 모두 돌이 되어 날아갔는지 바윗돌로 그득한 산줄기들. 발자국 뽀득뽀득 묻어나는 별들이 숲으로 살짝 내려오면 바스락거리는 잎사귀들, 순록의 흰 뿔들이 서로 나부끼거나 흔들거렸다. 주홍 집시나방이 날아간 자리엔 낙엽이 척척 쌓이고 있었고. 냉해를 입어 검푸르게 죽은 잎을 베개 삼아 곰들은 겨울잠을 달게 잤다. 추위가 깊은 날은 손가락에 끼워진 사냥꾼의 담뱃불도 따뜻해 보였다. 보고파했던 외로움의 끝이여. 오슬로 가로수는 고요하게 흔들리고 흰 눈은 정성스럽게도 내렸다. 

백야, 낮은 오래고 하지보다 길었다. 아침마다 이불 가득 들어오는 햇살조차 오로라를 닮아 반짝거렸다. 여행자는 오로지 침묵을 배워 밖으로 나서려는 울음까지도 눌러 참았다. 여름의 기온을 찾아 물이 달려가지만 금세 붙잡혀 얼어붙고는 했다. 빙판에 미끄러지면서 긴 머리칼을 날리던 여우가 절름발이로 비척비척 걸었다. 어딜 많이 다친 걸까. 서투른 걸음마, 아마도 생애 첫 겨울인가 싶었다. 전갈이 꼬리를 들고 구애의 춤을 추는 걸 가리켜 ‘부토투스 알티콜라’라고 하던데, 여우는 그런 사랑춤을 배우지 못한 듯 혼자서 쓸쓸하고 외로운 걸음이었다. 

변두리 여관에 숙소를 정했다. 잡지가 꽂혀있는 로비의 책들이 모두 얼어있어 입김으로 호호 녹여가며 심심풀이로 넘겨보았다. 그러다 졸음이 밀려오면 오래 닫아둔 호실을 열고 하얀 이불의 침대에 눕고는 했다. 두 다리는 아프고 어깨는 무너지는 듯했다. 커튼을 걷고 올려다본 창문 밖으로는 허공을 빽빽이 채운 눈송이들. 밤기차에 몸을 실어 자울거리는, 누추한 여행자 행색. 

나는 추운 방에서 변성기 소년의 저음처럼 설익은 노래들을 듣다가 수화기 저편의 여자가 흐느끼는 말도 들었다. 잠들 때 안경을 벗겨주던 사랑이 내게도 있었는데, 빨간 양귀비꽃을 같이 보기도 했었는데, 겨울이면 관계에도 추위가 밀려들어 헤어지고 미워하고 각자 멀리 떨어져 마음이 아프기만 하였다. 사랑도 나이가 들면 퇴행성관절염처럼 아프고 뻑뻑하고 시려오기만 하는 걸까. 찬바람에 서걱대는 마른 풀꽃처럼 사랑도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모양이었다. 세계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게 진리라던가. 시리고 서러운 마음들을 녹여주는 음악만이 유일한 연인인 걸... 발 부르트도록 걸어온 나그네를 위로하는 노래들이 그때마다 내 앤드리스 러브였다. 영원한 사랑, 온리 뮤직이여! 

사회민주주의 수준 높은 도성, 사람이 사람답게 살만한 복지와 음악의 천국 노르웨이에서 들은 노래들을 당신과 같이 듣고 싶어 이렇게 꺼내 들었다. 그간 아울로스와 함께 머물며 힐켈리흐 쿨투르 베르크스타(KKV) 레이블의 음반 수입을 돕고 소개 글을 나눠 쓰기도 했다. 그 중에서 내가 사랑하는 노래들을 꼼꼼히 골랐다. 

합창단 프스트 율레로의 <크리스마스 캄> 수록곡을 시작으로 코레 포 보스텐 밴드의 노래, 카롤라 마리아와 풍성한 오르간 소리가 지나가면 노르웨이 대표성가 ‘하를 콤데르 디네 아름메 스모’를 노르웨이 국립소년소녀합창단이 들려준다. 보컬 그룹을 이끄는 얀 에귬, 카리 브렘네스의 히트곡 ‘베를린의 사랑’의 이색 버전, 영화 <유 콜 잇 러브>의 노래를 담당했던 케롤라인 크루거의 목소리, 첼리스트 오게 크발바인과 동계올림픽 음악감독이었던 피아니스트 이베르 크라이베의 연주곡, 광장의 경적같은 목소리 시그바르트 닥스란드의 노래가 지나가면 스크룩 합창단의 기리에 찬트, 재즈싱어 술베이그 슬레타헬, 피아노의 청아한 리더가 돋보이는 빈테르모네, 오슬로 합창단이 부르는 성가는 그야말로 신비로운 아이슬란드 사운드다.

러시아의 밥 딜런 블라드미르 비쇼츠키를 재해석한 외른 시멘, 유명 TV 드라마에 삽입된 연주곡을 들려주는 아릴 안데르센, 손드레 브라트란드의 묵직한 목청으로 듣는 미국 민요 <방황하는 영혼>은 대륙을 넘나든다. 아일랜드 여가수 시너드 오커너가 오슬로의 노벨평화상 수상식장에서 부른 노래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끝으로 얼음으로 펼쳐진 구름 너머 땅 노르웨이 여행은 막을 내린다. 

아무리 물로 빨아도 사라지지 않는 소매 끝 얼룩이런가. 여행은 이 노래들로 잊을 수 없는 사연이 되었고, 코인로커에 감춰둔 보물을 비밀처럼 살피듯 생각날 때마다 꺼내어 추억하고는 한다.


글. 임의진(시인, 월드뮤직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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